푸른길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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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조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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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윌리 메이스(Willie Mays)



1931년 5월 6일 앨라배마 주 웨스트필드에서 태어난 메이스는 ‘5박자를 갖춘 선수(Five Tool Player)’ 가 아니라 ‘7-툴 플레이어’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펀치력과 정교한 타격, 빠른 발과 수비력, 그리고 강한 어깨를 모두 지닌 선수를 5-툴 플레이어라고 표현하죠. 그런데 메이스는 거기에다가 주위를 환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미소와 야구에 대한 끝없는 열정까지 지닌 선수였습니다.

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팬들의 시선이 그에게서 떠날 수가 없는 매력을 지닌 메이스는 1951년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빅리그에 뛰어들었습니다.

22년의 현역 생활 동안 메이스는 두 번의 리그 MVP와 타격왕 한번, 홈런왕 네 번을 차지했습니다. 1961년 밀워키 전에서는 한 게임 4홈런을 터뜨리기도 했고, 12번의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660홈런은 역대 4위에 올라있고, 2992게임은 역대 9위, 2062득점은 역대 7위, 3283안타는 역대 11위, 1903타점은 역대 9위, 그리고 338개의 도루(역대 109위)도 기록하면서 통산 3할2리의 타율을 남겼습니다.

그의 별명인 ‘세이 헤이 키드’의 유래도 재미있습니다. 니그로리그에서 다저스로 적을 옮긴 메이스는 처음에 선수들을 하나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건넬 때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헤이 맨’ 혹은 ‘세이 헤이 맨’이라는 말을 주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메이스가 점점 활약을 펼치게 되자 동료들이나 팬들은 그가 지나가면 ‘세이 헤이 키드’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신문에서 그 별명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그의 애칭은 ‘세이 헤이 키드’가 됐습니다.

메이스는 위대한 야구 선수이기도 했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모습은 뉴욕의 흑인 거주지인 할렘가(미국 빈민촌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요)에서 나무막대기를 이용한 스틱볼을 하는 장면입니다. 메이스는 자이언츠가 샌프란시스코로 옮기기 전까지 폴로그라운드로 경기를 하러 가기 전에 종종 할렘에 들러 청소년들과 스틱볼을 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뿌리와 야구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지요. 당대 최고의 스타가 길거리에서 청소년들과 막대기를 들고 야구를 하는 모습, 이 위대한 스타가 오늘날에도 큰 존경을 받는 이유입니다.






메이스는 스포팅뉴스 선정 ‘60년대의 선수’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중견수다.

통산 .302의 타율과 660개의 홈런(통산 4위), 1903타점(통산 10위), 그리고 2062득점(통산 7위). 이것만 보면 ‘타격능력이 장난이 아니었네.’ 라는 말이 먼저 나올 법 하지만 메이스는 단지 타격만 뛰어난 타자가 아니었다.

그는 통산 338개의 도루를 기록했는데 통산500홈런을 넘긴 타자들 중 300개 이상의 도루를 한 선수는 메이스와 본즈, 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통산 76.6%의 도루 성공률(338/441)은 현역 1위인 케니 로프턴의 도루 성공률(599/752, 79.6%)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보통 파워히터들은 홈런 수는 많지만 의외로 총안타수는 적은 경우가 많은데(물론 푸홀스 같은 괴물도 있지만.), 메이스는 단지 파워히터의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잘 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잘 쳤다.

메이스의 통산 볼넷은 1464개로 생각보다 적은 편인데(통산 18위의 기록인데 적다고 표현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메이스가 애런처럼 안타로 볼넷을 대신하는 유형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메이스처럼 3할 타율-3000안타-500홈런-1500타점-1500득점을 넘긴 선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메이스와 애런, 2명이 전부다. 거기에 300도루까지 가세한다면 그건 완전히 메이스만을 위한 기록이다.  

그는 수비의 달인이기도 했다. 센터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짧은 캔들스틱 파크의 영향도 있었지만 메이스는 광활한 센터를 자랑하는 폴로그라운드에서도 골드글러브를 받은 선수였다. 그가 받은 12개의 골드글러브는(그것도 12연패.) 외야수 중에선 로베르토 클레멘테만이 동일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외야수 중 이 두 명 이외에 두 자릿수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선수는 켄 그리피 주니어(10개)밖에 없다. 메이스의 팀 동료였던 펠리페 알루는 “만약 메이스가 처음부터 캔들스틱 파크에서 뛰었다면 골드글러브 20개는 받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메이스는 공-수-주를 완벽하게 갖춘, 그야말로 야구를 위해 태어난 선수였다.

다행스러운 참전기간

윌리 메이스는 1931년 앨라배마 웨스트필드에서 태어났다.(메이스를 포함, 미키 맨틀, 에디 매튜스, 어니 뱅크스까지 1931년에는 500홈런타자가 무려 4명이나 태어났다.)17살이 되던 1949년, 니그로리그의 한 팀과 계약을 맺은 메이스는 4할을 웃도는 타율을 기록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결국은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입단 첫 해인 1951년, 시즌 초반 메이스는 21타수 무안타라는 극도의 부진에 빠졌다. 하지만 22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쳐내 부진에서 탈출했다.(메이스의 첫 홈런 상대는 바로 워렌 스판이다.)시즌이 끝날 때까지 고른 활약을 보여줬던 메이스는 그 해 .274, 20홈런, 68타점이라는 신인치곤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압도적인 표차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멜 오트가 은퇴한 후, 거포에 목말라있던 뉴욕 팬들은 곧 메이스가 그 자리를 메워 줄 것으로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2년 메이스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메이스의 폭발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다행스럽게도 윌리엄스나 디마지오처럼 전성기를 군에서 보내지 않은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메이스는 기다려준 팬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345 41홈런-110타점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다. 무엇보다 그 해 월드시리즈에서 빅 워츠의 타구를 쫓아가 펜스 바로 앞에서 잡아낸 장면은 훗날 ‘The Catch'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결국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메이스. 하지만 이 때가 메이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 됐다.

Go West!!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1954년부터 메이스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메이스는 가장 먼저 40-40클럽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선수이기도 한데 특히 1956년에는 홈런 4개가 모자라 30-30클럽에 가입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30-30클럽도 메이스가 최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41-51-36-35개의 홈런을 쏟아냈던 메이스는 그러나 지역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의 텃세에 밀려 팀이 이전을 하는 바람에 결국 팀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다. 뉴욕에서의 마지막인 1957년, 메이스는 폴로그라운드에서 뛰었던 자이언츠의 중견수들 중 최초로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것으로 뉴욕팬들에게 답례했다.

이전 첫 해인 1958년, 메이스는 새 구장인 캔들스틱 파크에 적응이 안됐는지 29홈런과 96타점에 그쳤다. 하지만 곧 다음해에 다시 34개의 홈런을 쳐내며 아무 문제가 없음을 보여줬고 곧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메이스에게 도움이 됐던 것은 바로 캔들스틱 파크였다. 뉴욕 시절 홈구장으로 쓰던 폴로그라운드는 센터까지의 거리가 500피트가 넘었던 구장이었는데(그에 비해 좌측 폴대와 우측 폴대까지의 거리는 300피트도 안됐다.)중견수였던 메이스는 항상 엄청난 수비부담을 안고 경기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캔들스틱 파크는 센터까지의 거리가 420피트 정도로 짧았기 때문에 메이스의 부담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부담이 줄어든 덕인지 메이스는 부상을 당하기 전인 1966년까지 연평균 40개에 가까운 홈런을 쳐냈고 골드글러브도 11개나 따냈다. 그 당시 메이스는 맨틀과 함께 메이저리그 최고의 중견수였다.

1962년 메이스와 자이언츠는 다시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했다. 상대는 뉴욕 양키스.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지만 결국 랄프 테리에게 4안타 완봉승을 헌납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비록 우승은 실패했지만 그 이듬해에 윌리 맥코비가 44홈런으로 폭발해서 자이언츠는 맥코비-메이스-세페다로 이어지는 꿈의 클린업트리오를 갖게 됐다. 메이스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메이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월드시리즈에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됐다며 기뻐했다. 실제로 마리칼과 페리의 원-투펀치까지 있던 자이언츠는 누가 봐도 틀림없는 월드시리즈 우승후보였다. 하지만 메이스가 떠나기까지 자이언츠는 한 번도 월드시리즈에 가보지 못했다.

Say Hey Kid

니그로리그에서 자이언츠에 입단하고 한 동안 메이스는 동료들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지나가면 ‘Say Hey'나 ‘Hey Man'이라는 말을 건네곤 했는데 나중에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도 그런 버릇이 계속되자 팬들은 그에게 ‘Say Hey Kid’라는 애칭을 붙여줬고 언론에서도 그를 ‘Say Hey Kid’라고 부르며 곧 Say Hey Kid=윌리 메이스가 됐다.

메이스는 경기장 밖에서도 모범적인 선수였다. 그는 항상 경기가 쉬는 날이면 할렘가에 가서 아이들과 야구를 하곤 했는데 자신의 핏줄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난하는 것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뉴욕 언론들도 메이스에게만은 ‘천사(The Angel)'라는 표현을 썼다.

은퇴, 그리고 본즈

뉴욕 메츠로 떠나기 4년 전인 1968년 메이스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왔다. 바로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선수인 바비 본즈가 팀에 들어온 것. 메이스는 바비 본즈를 끔찍히도 좋아했고 자신만의 노하우들을 전수해줬다. 첫 해 제한된 기회 속에서 9홈런과 16도루라는 괜찮은 성적을 낸 바비는 이듬해, 32개의 홈런과 45도루를 기록, 메이스에 이어서 두 번째로 30-30클럽에 가입했다. 곧 둘은 단짝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바비는 메이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소개시켜주면서 아들의 ‘대부(Godfather)'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메이스는 흔쾌히 수락했다. 바비 본즈의 아들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배리 본즈, 바로 그다.

1972년, 만 41세의 메이스가 더 이상 자기 몫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자이언츠 구단은 메츠와 트레이드를 하게 되고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고 싶었던 메이스는 결국 다시뉴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은퇴할 때가 된 것을 알았던 메이스는 이듬 해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신시내티를 상대로 660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 해 메츠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함에 따라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회를 얻었지만 팀이 7차전에서 패함에 따라 결국 반지 하나로 만족한 채 필드를 떠났다. 메이스에게 미안해하던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훗날 AT&T파크의 입구중 하나를 ‘윌리 메이스 게이트’라 이름 짓고 그를 기렸다.

1979년, 입회 자격을 얻은 메이스는 94.68%의 높은 지지율로 첫 해 입성에 성공했고 바비 본즈와의 약속을 따라 지금도 가끔씩 구장을 찾아 배리 본즈를 응원하고 있다. 오늘날 배리 본즈를 본다면 먼저 세상을 떠난 바비 본즈는 지하에서 메이스에게 얼마나 미안해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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