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길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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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조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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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전우익·권정생 20년 교유기

사진 / 전우익, 권정생, 이오덕


‘오성과 한음, 관중과 포숙이 안부러우니더’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의 작가 전우익씨와 『몽실언니』의 권정생씨. 날카로운 글들을 통해 이 사회의 부패와 비도덕성, 생명을 업신여기는 풍조 등을 질타해온 두 사람은 이웃한 지역에 살며 20년 넘게 한결같은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서로 만나기 힘들기가 서쪽에 드는 삼(參)이란 별과 동쪽에 뜨는 상(商) 별과 같은데 어찌된 셈일까, 오늘 밤에 우리가 이 촛불 밑에 마주 앉아 이야길 나누다니. 젊음이란 잠시 잠깐, 피차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옛 친구들의 안부를 나누다보니 절반이 저승으로 가 놀랍고 슬픈 심정이 창자를 에는 듯하다…… 친구가 감회에 젖어 하는 말 「회포를 풀도록 실컷 술을 마시세」. 연달아 열 잔을 권하고 받아 마셨으나 취하지 않는 것은 친구의 변함 없는 우정 때문일까? 날이 밝아 우리 다시 헤어지면 어떻게 될지 아득한 세상』

  이 시는 중국의 시성 두보가 20 년 만에 시골에 있는 옛 친구를 찾아가 하룻밤 지내면서 겪은 일을 쓴 것이다.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씨의 수필집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의 첫 이야기에 전씨가 직접 번역, 인용한 내용이기도 하다.

  대선을 앞둔 요즘 정치인들은 이익을 위해 어제까지 믿고 따랐던 사람을 하루 아침에 저버리는 게 예사다. 현실 정치판에서 옛 친구를 두보의 시에서처럼 믿고 환대하는 건 난망일까. 이 당에서저 당으로 옮겨 다니는 「철새」정치인들을 보는 국민들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우정은 한결같이 감동을 준다. 한국인의 우정을 말할 때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오성은 조선 선조 때의 공신 이항복(李恒福)의 호다. 한음은 영의정에까지 오른 이덕형(李德馨)의 호다. 두 사람은 이웃해 살면서 글방에 다닐 때 처음 만났다.

  오성이 11살 때, 한음이 5살 때였다. 두 사람 모두 담력이 크고 재치가 있었으며 죽을 때까지 사귐을 지속했다. 오성이 광해군 때 임해군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을 때 한음은 날마다 술과 눈물로 지냈다고 한다.

  눈을 밖으로 돌리면 관중(管仲)과 포숙(鮑叔),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마르크스와 엥겔스, 독일의 유명 법학자 루돌프 예링과 칼 프리드리히 게르버가 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감싸 준 포숙에게 후일 관중은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라 하지 않았던가. 서로를 깊이 존중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감싸고 고쳐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위대한 우정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로마법학자 예링과 게르만법학자 게르버는 서로 다른 학문적 시각을 갖고서도 상대를 이해하며 두 학문을 통합시키는 데 이바지해 법률학에서 역사학파가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1. 흐르는 물처럼 한결같은 사귐

  전우익(全遇翊·72)씨와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權丁生·60)씨의 사귐도 이와 같은 고전적 우정사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두 사람은 12년이나 나이 차이가 나지만 경북 봉화와 안동, 이웃한 지역에 살며 20년 넘게 교유해 왔다. 흐르는 물처럼 한결같이 서로의 삶과 세계관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

  전씨와 권씨 모두 「꼬장꼬장한」 선비로 겉으로는 은둔한 처사처럼 살면서, 실제로는 날카로운  글들을 통해 이 사회의 부패와 비도덕성, 생명을 업신여기는 풍조 등을 질타해왔다.

  전씨는 수필집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993)와 『호박이……』(1995) 두 권의 책을 냈다. 10월말 현재 1, 2권 합쳐 7만여권이 팔린 이 책들에는 농촌 삶에서 길어 올린 자연의 이치와 교훈이 시적인 필치로 담겨있다.

  『올 봄에 이웃 명호면에 농사 지으러 들어온 신부님과 울진 가는 길에 불영계곡을 거쳐 갔습니다. 그 골짜기 돌투성이 산에 자란 붉대(적송, 강송, 춘양목) 소나무 줄기가 한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이곳 저곳 큰 바위 위에도 제법 큰 소나무가 푸르름을 뽐내며 늠름하게 서 있었습니다.  저게 뭘 먹고 살까?  다음 날 밤 일직(면) 권정생 선생님께 그 소나무 이야길했지요, 뭘 먹고 사느냐고.선생님 말씀이 「그래요, 간신히 겨우 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거지요」했습니다. 간신히 산다. 그래도 줄기는 오색으로  빛나고 잎은 푸르기만  합니다』 (『호박이…』 중에서)

  전씨의 글들을 시적이라고 한다면 권씨의 그것은 산문적이다. 권씨는 동화 『몽실언니』를 비롯, 1백 권의 책을 낸 이야기꾼이다.

  19살 때부터 앓기 시작한 병이 고황에 들었지만 모든 삶이 글쓰기에 집중돼 있다.

병을 이기고 뽑아낸 그의 글들은 놀랍도록 날카롭다. 특히 지난해 말에 발간된 그의 첫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은 재생용지를 사용하고 광고를 거의 하지 않고 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스테디셀러가 됐다.

  『그러나 자동차와 자전거와 지게가 상징하는 진정한 삶의 가치가 그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분명해졌다. 풍요에 따르는 상대적 빈곤과 편리와 함께 또 다른 불편이 갑절로 늘어났다.
  서울은 몇 시간만에 오고 가는 대신 가족들과 차분히 대화조차 못할 만큼 시간에 쫓기고 있다. 도시가 비대해지면서 농촌은 초라하도록 황폐해지고, 이런 기현상은 온갖 범죄를 만들었다』(『우리들의 하느님』 중에서)

  두 사람은 사실 공통점보다 변별점이 더 많다. 두 사람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판화가 이철수씨의 얘기다.

2.. 「깊은 산 속 약초 같은 사람」

  『전선생님은 제 아버님 연배십니다. 늘 격의없이 대하시면서 저를 「아들친구」라고 부릅니다. 그렇듯 소탈한 성품을 갖고 계세요. 끝없이 책 읽고 공부하시는 데다 늘 건강하셔서 뵙기 좋습니다. 권선생님은 최근 들어서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남에 대한 이해의 폭도 깊고요. 깊은 병 때문에 얼핏보면 세상과 불화할 것으로 여기기 쉬운데 그렇지 않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나 따뜻하고 예리합니다.』

  시인 신경림씨는 전씨를 「깊은 산 속의 약초 같은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는 농업만이 참으로 창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만이 창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은 소비만 하고, 식물만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 나무와 풀에 대한 철학이다. 그가 나무와 풀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으로부터 세상살이의 이치를 배우고 사람 사는 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한편 『안동시편』의 시인 이태수씨는 「권정생, 또는 조탑리 외딴 오두막집」이란 시에서 권씨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낡은 책으로 둘러싸인 비좁은 방에서 그는 이마와 가슴에 불을 켠다. 이 세상의 몇 됫박 소금으로, 손길이 남달리 따스한 이웃으로, 마음의 탑을 지성으로 쌓고 쌓으며, 저토록 푸른 불을 가슴마다 매달아준다. 불 밝혀준다』

  전우익씨는 1925년 경북 봉화에서 대지주의 손자로 태어나 광복 전 서울에서 중동학교를 마쳤다. 47년께부터 민청에서 청년운동하다가 사회안전법에 연루돼 1년3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당시의 민족의식은 거창한 이념이 아닌, 삶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니더』

   6·25 전쟁이 끝나고 그는 사회안전법의 제약을 받으면서 고향에 머물렀다. 봉화 밖으로 나가려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 데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조차 감시의 대상이 되므로 그는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주로 스님이나 신부들과 사귀었다.

  『승가회에 찾아가서 밥 얻어먹고 여비도 얻어썼니더. 그런데 승가회 간사 한분이 글을 써달라고 해요. 밥 못 얻어먹을까봐 글을 써줬죠.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글을 쓰면 얼마간 삶이 정리되어서 좋았고……』

  지식인의 손으로 농사를 지으려니 「뼈마디가 새로 형성되는」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그는 농사꾼으로 살아갔다.

  『논농사는 사내아이 기르는 것 같고, 밭농사는 여자아이 기르는 것 같니더. 농사 짓고 살다보니 세월이 너무 퍼뜩 가버려서 아쉬웠어요. 나이가 드니 꾀가 늘어서 나무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나무는 심어놓기만 하면 제가 놀러갔다 와도 저 혼자 잘 크고 있고, 그것이 또 훗날을 위해 애국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기르는 재미도 있고요』

3. 예배당 종지기 노릇

  1937년 9월 일본 도쿄 혼마치(本町)에서 태어난 권정생씨는 8년 6개월간 그곳에서 생활했다.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곳에서 『몽실언니』의 주인공 몽실이를 닮은 히데코 누나, 경순이 누나, 그 외의 가엾은  아이들과 정이 들었다. 1946년 광복 이듬해 3월 정든 그들 곁을 떠나지않으려 애썼지만 끝내 떼밀려 버스에 올라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해 4월은 보릿고개가 심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먹고 있었다. 조선인연맹에 가입했던 그의 두 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던 그의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 그는 외가가 있는 청송으로 갔다. 함께 모인 것은 47년 12월.  아버지의 소작농사만으로는 월사금도 못내 어머니가 행상을 했다.  그는 이미 열살 때부터 이미 밥 짓는 법을 배웠다.

  1953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그리고 점원 노릇을 했다. 열아홉살 때부터 결핵을 앓았다. 두 해를 버티다가 195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에 걸려 돌아온 아이들이 10명이나 됐다.  그는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병이 깊어져 온 몸이 망가져 갔다. 1965년 동생을 결혼시켜야 하니 어디 좀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구 김천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걸식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틈만 나면 책을 읽는 습성이 있었다. 신문연재 소설에서부터 시장바닥의 삼류 대중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눈과 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런 습성이 오늘의 그를 훌륭한 작가로 만든 요인인지도 모른다.

  1967년 일직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그곳에서 그는 예배당 종지기로 16년을 살았다. 그 조그만 방에서 글을 쓰고 아이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살았다.

  그는 『그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종줄을 잡아당기며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은 지금도 그리워진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69년 동화 『강아지 똥』으로 월간 「기독교 교육」의 제 1회 아동문학상을 받은 그는 73년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75년 『강아지 똥』으로 제 1회 한국아동문학상, 86년 산문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등을 펴냈다.

  그의 동화세계는 여느 동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미화된 세계가 아니다. 산다는 게 항상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 살아있는 사람은 일하고 또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리얼리즘에서 출발한다. 그의 동화는 크게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내용과 인간 동식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4. 오래 묵힌 포도주 맛 같은……

  전씨와 권씨가 처음 만난 것은 21년 전.  

  「(전)선생님이 저희 집에 찾아오신 것이 1976년이었지요. 이오덕 선생님과 함께 오셨을 때 너무 닮아 쌍둥이는 아니라도 사촌쯤 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스무 해가 됐습니다.  그동안 귀찮은 일도 있었고,  오지게 바람맞은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질기게도 붙어 있군요」(『우리들의 하느님』 중)

  참된 우정이란 필시 「오래 계속될수록 좋은 법이고,  마치 오랜 햇수를 묵힌 포도주처럼 달콤해지는 것」(키케로)이라는데, 두 사람 사이도 이런 「맛」이 느껴질 것인가. 먼저 전씨의 집을 먼저 찾았다.

  10월6일 오후 4시께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전우익씨 집. 조부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고택이다. 산수유나무가 행랑채를 감싸고 있고, 두릅나무 닥나무 단풍나무 가죽나무 등 30종이 넘는 나무 마당 가득 들어서 있다. 본채의 벽에는 흰물떼새의 큰 사진이 걸려 있다. 고흐의 그림이 걸려있는자리인데 고택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해 떼어버렸다고 한다.

  이웃 영주군의 고교 선생 네 분이 전씨와 함께 마당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선생들은  『아이들 시험기간이라 학교를 일찍 파하고, 전 선생님을 뵈러 왔다』고 했다. 이렇듯 전씨의 집을 찾아오는 이들이 가끔 있다. 그의 글이 주는 감동을 만나서 다시 확인해보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얘기는 농사짓는 것에서부터 교육 환경 문제까지 두루 오갔다. 전씨는 이야기하면서 내내 무릎을꿇고 앉아 있었다. 구멍 난 양말 뒤에 검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선생들이 돌아간 건 담장 너머 먼 산에 이내가 보일 무렵. 바깥 기운이 제법 쌀쌀해졌다.

  『군불 좀 넣어야겠니더』

  전씨는 주변 야산에서 주워온 나뭇가지와 장작을 한쪽에 쌓아두고 사랑방 부엌에서 불을  때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군불 타는 소리가 정겹다. 요즘엔 웬만한 깊은 산골 아니면 대개가 보일러를 사용하고, 현대식 부엌에 가스레인지를 들여놓고 있지만 그는 부엌을 개량하지 않고 있다. 요즘 그가 짜고 있는 부들 돗자리가 사랑채 마루 한 켠에 가지런히 걸려있다.

  『고향이 어데요? 뭐 할라꼬 그 복잡한 서울에서 사능교. 시골로 가소』

  전씨는 난데없이 객을 나무란다. 산업화에 대한 반감, 혹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삶의 축을 이루고 있는 과학에 대한 거부감을 그는 그런 말로 표현했다.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도시 삶을 반성하라는 투다.

5. 존재 자체와 쓸모의 가치

  군불을 든든히 넣고 그의 서재에 앉았다. 서재 벽에는 사회과학과 각종 문학서적, 화집, 『사기』를 비롯한 고전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뭉텅한 나무토막들. 나무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나무를  빼고 그를 얘기할 수 없다. 그만큼 그는 요즘 나무에 빠져 있다.

  그가 나무와 인연을 맺고 제일 먼저 심은 것이 살구나무.  자신이 사는 곳을 살구나무 골짜기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뒤에 느티나무도 심고, 은행나무도 심으면서 나무로부터 삶의 이치를 터득하게 됐다.

  그는 버려진 나무토막을 주워 연필꽂이를 만들면서도 허투루 생각지 않는다. 옻나무로 만든 필통은 세월이 흘러 손때가 묻을수록 물리적 무게는 줄지만 존재 자체의 무게는 무거워진다는 걸 알고, 끌로 나무를 타면서 결 따라 타면 힘이 덜 들고 엇결로 타면 힘든 것에서 사나운 운세를 지닌 사람이 엇결로 「산다」고 깨닫는다. 인간들이 죽었다고 단정해 다듬어놓은 나무가 향기를 뿜어 내고 빛깔을 바꿔 가며 자꾸 변하는 데서, 훌륭한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역사에 길이 남아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주는 이치를 짐작한다. 나무를 직각으로 자를 수 있는 방법은 「자르고 자르고 또 자르는」 길밖에 없듯이 제대로 사는 것도 살고 살고 또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깨달아 한평생 그 길을 찾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참답게 사는 길이라고 여긴다.

  『몇 백년 된 대추나무 본 적 있어요? 열매를 맺지 못해도 그 아름드리 나무가 풍기는 기운이 있어요. 요즘엔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나무를 베어내 버려요. 여기서 존재 자체와 쓸모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유능하나 왠지 불편한 사람과 별 도움도 되지 않지만 존재 자체로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니더』

  선조들은 지혜를 몸으로 터득했다. 그래서 오늘의 바람을 보고 내일의 날씨를 짐작했으며 나무가 자라는 모양을 보고 다음해 농사가 풍년이 될지 흉년이 될지조차 짐작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서만 지식을 섭렵하는 요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삶의 태도다. 전씨는 선조들의 그런 지혜를 깨우치고 있는 이다.

  『사는 문제도 그래요. 삶을 복잡하게 사는 것보다 얼마나 더 간단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니더. 요즘 도시 사람이 먹는 음식을 보세요. 그렇게 복잡한 음식을 먹지만 도시 사람들은 얼마나 허약합니까. 그런데 소는 풀만 먹고도 얼마나 튼튼합니까』

   이날 저녁 잠들기 직전 전씨는 잘 자라고 하면서 『장이는 직업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삶의 태도』라고 말했다.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했는데 그의 말이 머리 속에서 오래 맴돌았다.

6. 「권선생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10월6일 전씨를 재촉해 권씨 집을 향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어서였을까, 고희를 넘긴 전씨는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우니……』. 전씨는 노래를 잘 부른다. 특히 잘 부르는 곡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성격이 밝다. 우스갯소리를 잘 한다.  좀체 남 칭찬하는 말을 않더니 안동군 일직면이 가까워지자 권씨에 대해 한 마디 했다. 『권선생님은 우리 국보 겸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시더. 온갖 풀 꽃 이름을 다 알고 있어요』  안동에 장이 서면 두 사람은 장터 포장마차에 들러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1천원으로도 만족할 만큼 먹었던 때가 있었다. 이들은 보통사람들이 흘려버리는 일들조차 특별한 시선으로 포착해 말의 도마 위에 올렸다.

  「고속도로 공사로 산이 깎여나가고 논밭이 파묻히고 마을의 집들이 헐려나가고 이웃들이 고향을 떠나가는 아픔 같은 것은 왜 말하지 않을까?」(권정생씨)

  「농가는 이 가을에 빚을 털어 버리고 민족은 이 가을에 분단의 장벽을 털어 버려야 하는데 그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습니다」(전우익씨)

  「풍요로운 삶이란 새 한 마리까지 함께 이웃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들끼리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건 더럽고 부끄러운 삶이다」(권)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만드는데 우리도 상처로 좌절하지 말고 상처를 딛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민족이 돼야겠다고 여겨봐요」(전)

   그러나 두 사람은 사소한 것이라도 원칙적인 면에서는 서로 물러서지 않는다. 전씨가 『호박이……』를 내고 권씨에게 서평을 부탁한 적이 있다. 이때 권씨는 한 치도 추켜올리지 않았다.

   『(전)선생님, 「깎아내려 죽이기와 추켜올려 죽이기』란 노신의 글을 선생님도 읽으셨지요?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중국에 왔을 때 청년들이 그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되돌아 가버린 이야기 말입니다. 마치 타고르를 신선처럼 연단에 세워놓고……
   결국 지나친 떠받들기가 타고르의 진실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저는 추켜올리기도 싫고 깎아내리기도 싫으니 그냥 제 멋대로 몇 자 쓰겠습니다』

7. 빌뱅이 언덕의 대담

  권씨의 집은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빌뱅이 언덕에  있다. 집앞 야트막한 기슭에 이르러 권씨의 기척이 들리자 전씨가 갑자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전씨는 웃음을 참으며 먼저 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권씨는 수돗가에서 감자를 깎고 있었다. 감자 껍질을 유난히 두껍게 깎았다.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개 두 마리, 13년 된 뺑덕이와 어린 두디기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전씨는 한참만에야 뒷짐을 진 채 슬그머니 나무 뒤에서 나왔다. 전씨는 잘 있었느냐, 어떠냐 말도 없이 정색하며 문고리를 붙잡고 신발부터 벗었다. 그리고는 『어서 들어갑시다』 하며 일행을 재촉했다. 낯선 객에 대한 경계심으로 굳어있던 권씨가 이 느닷없는 행동에 웃고 말았다.

  권씨의 집은 10평도 안 돼 보이는 작은 흙집이다. 84년 원고료로 받은 80만원을 들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마루도 없다.  책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거실 겸 부엌, 네 사람이 쪼그려 앉기도 비좁은 사랑방이 전부였다. 권씨는 『여는 아랫목이 없어요』라며 앉을 것을 권했다. 권씨의 말소리에 힘이 없다. 힘겹게 한 마디 하고 나면 휴, 한숨을 쉰다.

   ―지붕을 유난히 빨간 색으로 칠해 놓아서 마치 동화 속 집 같습니다.

  『거기 제가 칠한 게 아이시더. 고속도로 공사하면서 미관 상 좋지 않다고 그쪽 사람들이 칠했어요. 처음에는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쪽만 빨간 색으로 칠했어요. 지금은 뒤쪽도 칠했지만. 솔잎이 벌레 먹어 누렇게 마르자 그 나무까지도 파랗게 칠한 사람들이시더』

  전씨는 권씨 앞에 고 박수근 화백의 화집을 선물로 내놓았다. 권씨가 그 화집을 갖고 싶어했지만 안동의 책방에는 그 책이 없는데다 권씨가 먼 길을 여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하지 못하고 있었단다. 전씨가 서울의 큰 서점에 들른 차에 구해갖고 온 것이다.

  『박 선생님이 동화도 그렸구나. 요새 화가는 박 선생님의 「나무와 여인」 같은 이런 서정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그리지 못할 겁니다. 자연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은 경험한 것만큼 알고, 아는 만큼 이해한다는데……』(권)

   방안에 TV는 없고, 작은 라디오가 있다. 한 켠에 약봉지와 사탕, 캐러멜이 있고 도자기 베개가 눈에 띄었다.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인데 금이 갔다고 누군가가 내버린 것을 주워다 플라스틱용 본드로 붙여 사용하고 있었다. 한쪽 벽에 얼마간 금박지를 붙여놨다. 전씨가 이를 놓칠 리 없다.  『이제 실내장식도 마이 해놨네』

  『불을 켜도 방이 어두웠는데, 저거 붙여놓으이 2분의 1은 더 밝아지데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의 얘기를 끄집어 냈다.

  『전 선생님과 이오덕 선생님 두 분이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분위기가 약간 달라요. 이 선생님은 교장선생님 같고,  전 선생님은…』(권)

   머뭇거리던 권씨가 『조리장사』라고 말해 방안에 웃음이 돌았다.

   ―조리장사가 어떻게 생겼나요.

  『조리장사 못 본 사람은 전 선생님 보면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가깝게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때 전 선생님이 넥타이만 안 맸을 뿐이지 바바리를 입고 한껏 멋을 내고 왔니더. 이선생님은 엄한 선생 인상이어서 가까이 하기가 좀 어려웠던 게 사실이고. 그때 이후 전 선생님과도 그저그렇게 지냈어요. 76년이니까 유신 말기로 당시는 참 힘든 세상이었는데, 언젠가 전 선생님이 제게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선물하셨어요. 그 책에는 한 변혁운동가의 지난한 삶이 담겨있어요. 그 책을 읽고 「아, 전 선생님은 나하고 같은 마음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거니더.  사실 친구가 되려면 마주 앉아 아무리 얘기해도 안 되니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선물했을 때 상대방이 그 책을 좋아하면 서로 마음이 맞는다고 볼 수 있어요』(권)

  『맞아 나도 자꾸 잊어 버리네』(전)


8. 「앉아 있기조차 힘들다」

  그 시절 안동에서 봉화로 온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 선생님, 어제 전화 받고 안동(읍) 가려고 나갔는데 버스가 오지 않아 7시 반이 넘도록 까지 기다리다 못 갔습니다.  중국 목판수인 오작인(吳作人)의 「금붕어」는 정말 놀랍습니다.
  1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니 그 중엔 재주 있는 사람도 많은 건 당연하겠지요. 현미는 아직 한 말쯤 남아 있습니다. …… 그가 입대한다니 또 속이 울컥 치밉니다 …… 저는 요즘 높은 열에 시달리지 않아 참 다행이지요. 살아있는 동안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게 모든 인간의 운명이지 않습니까.…… 저도 이 달엔 무척 많이 썼습니다. 너무 고달픕니다. 1988. 9. 24 권정생 올림』

   ―권 선생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과 많이 닮으셨어요.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지,  조리장사보다야 백 번 낫죠. 허허』―두 분이 친구가 되어서 어떤 점이 특히 도움이 됐습니까.

  권씨가 대답은 않고 웃으며 『전 선생님은 친구가 아니라 원수야』 한다. 『친구 사이의 속사정이란 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죠. 제가 주로 피해를 봤어요(웃음). 그렇다고 어디 고소할 데도 없고』

   ―어떤 피해를 보셨어요.

  『말로는 못하지,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참을 뿐이니더』(권)『제가 권선생님 기를 꺾은 게 있어요. 5공 때 제가 전씨니까 전두환이고, 권 선생님은 권씨니까 권정달이라캤지요.  그러이 꼼짝 못하데요』(전)

  『전두환씨가 대통령 되고 부터 압박과 설움 속에서 보냈어요』(권)

  『그게 참 희한합디더. 장닭이 싸울 때 한 번 이긴 놈은 계속 이기고, 진 놈은 계속 지더라고』(전)

   ―전 선생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깎고 만든 필통이나 책상, 돗자리 같은 것을 선물하시던데, 권 선생님은 어떤 선물을 받으셨나요.

  『뺏어가지 않은 게 다행이니더.  아, 사실은 나무 사진이 있네요, 숨겨놓은 것은 누가 가져갔고』

   ―요즘 글은 많이 쓰시는지요.

  『글쓰는 게 힘들어요. 앉아있기가 힘들어서. 하도 이러니까, 병원에서는 벌써부터 죽는다고 했는데……』

  권씨의 머리숱이 많이 빠져 있다.

   『이 「지붕」 상태는 어이 됐나 하면 말입니더. 한 집사님이 신장에 좋다는 약을 줬는데, 그 약이 너무 독해서 머리 감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더니 그렇게 됐어요』

  권씨는 30년 전에 한쪽 신장을 떼 내었다. 그 뒤로 그는 오줌 주머니를 차고 다닌다.
  석 달 전 권씨는 병원에 가서 소변검사를 했는데, 단백질이 소변으로 빠져나간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 수발할 만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혼자 있으면 편하죠 뭐, 누구 앞에서 찡그러지 않아도 되고』 한다.

『권 선생님은 유명한 의원 찾아가자캐도 고집이 워낙 세서 안 가니더』(전)

  권씨가 딴청을 부린다.

  『한번은 발이 엄청 부었어요. 청솔잎을 태워 연기를 쐬었더니 부은 게 가라앉았어요』

9.「컴퓨터가 인류 멸망 재촉할 수도」

  『권 선생님은 참 아는 것도 많아요. 언젠가 이 아플 때  듣는 기막힌 약을 가르쳐줬어요. 그것도 모르니껴, 하면서. 조선 간장을 팔팔 끓여서 솜에 묻힌 다음 그걸 아픈 이로 지긋이 물면 균이 죽는 모양이니더』(전)

  『해마다 금년에는 죽는가보다 했는데, 그러구러 벌써 13년이 지났시더. 병원 의사들도 제가  아직껏 살아 있다는 걸 안 믿으려 해요. 동화 「강아지똥」 써놓고 죽는다고 했는데 안 죽었어요.
  그래서 「몽실언니」 끝낼  때까지만 살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 했는데, 이렇게 살아 또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어요.  어제는 누가 작품 목록을 적어보냈데요. 모두 계산해 보니 그동안 쓴 작품이 1 백 개가 넘어요』(권)

   84년 발간 이후 40여만 부가 팔렸고 TV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몽실언니』. 광복 후 극심한 이념갈등과 대립 속에서 모진 수난을 겪어온 우리 겨레의 이야기이며, 몽실이는 우리 어머니들의자화상이기도 하다. 아동문학의 걸작인 이 작품은 창작과정에도 숱한 일화를 남겼다. 연재하던 잡지에 원고는 보냈는데 갑자기 두 달 동안 원고가 실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착한 인민군 청년과 몽실이가 주소를 교환하는 내용이었어요.  편집자에게 물어봤더니 안기부에서 삭제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서 자꾸 전화온다고 해요. 그 부분을 빼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더군요』

  전씨가 한 마디 거든다. 『백 권 썼으면 그만 쓰소』

  『금년에는 거의 못썼어요. 그동안 노트에 조금씩 써온 게 있긴 한데, 그기 천5백장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쓴 게 천8백장이래요. 그러니 앞으로 쓰다보면 5천장이 넘겠더라고요. 아휴, 그래요. 그거 써봤자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텐데……』(권)

  방안에는 앉은뱅이 책상 하나 없다.

  ― 책상도 없이 어떻게 글을 씁니까? 누워서 씁니까?

  『누워서 쓰면 볼펜이 안 나와요. 전에는 누워서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써보기도 했어요』(권)

   ―잘 써지는 펜이 있잖습니까.

  『너무 잘 써지는 펜은 손에 힘이 없으니까 글이 자꾸 미끄러져요』(권)

   ―컴퓨터로 글을 쓰면 좀 낫지 않을까요.

  『텔레비전 쳐다보는 것도 힘든데 모니터 보고 글 쓰려면 그게 되겠어요?』(권)

  전씨는 『컴퓨터가 인간이 망하는 길을 재촉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요즘 제대로 쓰지 못하신다면 어떤 책들을 보시는지요.

  전씨가 말을 받아 『야한 얘기책 소개 좀 해주소』 하고 농담을 하자 권씨가 진지하게 되받았다.

  『야한 책이라……. 60년대 지금보다 더 건강이 좋아 민요 채집하러 떠돌아다닐 때 말입니더. 동네마다 초가만 가득하던 때 노인들 얘기 들어보면 그렇게 원색적이에요. 근데 그게 추하게 들리지 않았어요. 도리어 건강하게 여겨졌니더』

10. 「삼겹살에 소주 한잔」과 보리밥

  ―건강이 좋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권씨 대신 전씨가 받아  『선생님이 됐을 거야』라고 말했다.

  『아, 열여덟 살 때 무당이 저더러 하늘이 내려준 고독한 인간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절로 갈 팔자라고 했니더. 그때는 뭐 별소리 다한다고 했지요. 그때 저는 성경책을 파고 있었거든요. 요즘 생각하니, 그 점쟁이 말이 맞는 것 같애. 이  집에 오고 나서부터, 주역이나 토정비결도 보고 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고 할매들이 가끔 와서 궁합 봐달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세이」 하면서 아는 대로 말해주곤 했어요』(권)  전씨가 『그 할매들 이제 다 죽었지요』  하면서 한숨을 쉰다.

   ―그 가운데 권선생님이 아직도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할매 한분이 있었는데, 자기 것이 없으면 과수원에 가서 사과라도 훔쳐 가져오곤 했니더. 「할매 그러면  안된다」하면 「내가 아이면 누가 이리 갖다주노」하던 양반이었죠. 그 할매가 죽었어요. 죽기 6개월 전인가, 그렇게 똑똑하던 할매가 갑자기 멍청해지더라고요. 한참 때 어디 골목길에서 마주치면 인사하고 그냥 헤어질 수도 없고, 붙잡히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얘기를 해요. 감나무 그늘에서 얘기하다보면 언제 그늘이 저 반대쪽으로 가요. 하이,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끝도 없이 얘기를 시켜요. 그 양반이 만날, 돈 없다케서 「할매 약초 캐서 판 돈은 어디 뒀나」 하면 「그게 붙어날 게 있나」 그랬는데, 죽고 나이 베갯잇 속에서 40만원이 나왔어요』

  언젠가 권씨는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가봤는가요?」「예, 못가봤습니다」「그럼, 연애도  못해 봤나요?」「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권)

   ―젊은 시절 사귀었던 사람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이가 있습니까?

  『열일곱 살 때부터 3년간 부산 있을 때인데 갸 이름은 잘 모르겠니더. 한동갑이지 싶은데. 아, 참 착했어요. 책을 사면 「정새이 니 먼저 보고 줘라」하면서 저에게 줬어요.  그래서 읽은 다음 돌려주곤 했니더. 「나 보관할 곳도 없는데 니 가져라」 해도 계속 책을 사줘요. 성경책 찬송가도 사서 주데요.
  겨울에 추울 때 만나면 「한 쪽씩이라도 따뜻하게 해야지」 라면서 자기가 끼고 있던 장갑 한쪽을 벗어줬어요. 요새 청소년들도 그럴까요. 그 사람 고아원에 있다가 충청도로 식모살이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부모는 모두 전쟁통에 폭격 맞아 죽었답니더』

  권씨가 익은 감자를 내왔다.  알맞게 익었다. 권씨가 저녁때까지 먹기 위해 많이 깎았던 것인데 객들이 다 먹어치웠다.

  감자를 먹으면서 권씨가 시인 안도현의 시 「퇴근길」을 얘기했다. 시 전문은 이렇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란 표현을 두고 두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이 자랄 때는 보리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가난한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이며 감동을 주는 시구로 떠오른 것에 대해 우리 사회가, 그 구성원의 감정이 이만큼 사치스러워졌다는 걸 읽어낸 것이다.

11. 서로 섬기는 삶

  ―바깥에 텃밭이 있던데 농사는 지을 수 있습니까.

  『글자 몇 자 쓰기도 힘든 상황인데 뭐가 되겠어요. 사실 올해는 텃밭에라도 뭐 좀 심어야겠다 했는데 괭이로 몇 번 밭을 손질하다 보면 그 뒤 며칠동안 앓아 누워요. 그래서 이도 저도 못하고』(권)

  『아무래도, 전생에 큰 죄를 지었어』(전)

  ―빨래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하니더』(권)

  『권 선생님은 남이 도와주는 것을 무척  싫어하니더』(전)

  『남이 도와주면 더 귀찮아예, 선생님』(권)

  『그건 그래요. 사실, 저도 명절 때나 가족이 모이게 되면 밀린 빨래를 미리 해둬요. 그러지 않으면 며느리들이 고생하지요』(전)

  ―근처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면서요.

  『저는 결사반대하고는 있어요.  우리 동네하고 아래 동네 사람들만 반대하고, 일직면 사람들은 거의 찬성하는 분위기니더. 1년 세수입이 20 억원이나 된다니, 그 돈 보고 너도나도 찬성하는 거니더. 자연을 거스른 뒤 그  죄 값을 어떻게 받으려고……. 안 그래도 이곳 안동지방은 댐을 두 군데나 막는 바람에 안개가 끼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무척 추워졌습니다』(권)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서로 섬기는 삶」이라고 권 선생님은 말씀하셨는데요. 그것이 여타 종교의 본질이기도 합니까.

  『착한 일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보다는 착한 일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니더. 복을 받든, 천국에 가든 못 가든 그건 중요한 게 아이시더. 과정을 중시해야 평화가 오니더. 사람들한테는 착한 심성도 있고 악한 심성도 있는데 될 수 있으면 착한 심성이 이기기를 바라니더. 옆 집에 가서 월드컵 축구 한일전을 봤니더.  그거 축구가 아니고, 전쟁이데요. 일본 사람들이 졌다고 막 울어요. 일주일 전에 벌써 지방에서 올라와 텐트치고 줄 서 기다리는 정성도 대단하고. 자기 나라는 돈도 많고 대단하다고 하면서 왜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열등감에서 못 벗어나는지』(권)

  ―열등감이라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자기네들은 항상 우리한테 밀리고 있다는 압박감이 있는 것 같아요. 도쿄에서 살 때였어요. 그 중 띄엄띄엄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절대 문을 열어놓지 않아요. 한국사람들은 여름에 더우면 솥을 바깥에 내다놓고, 죽을 끓이건 뭐건 다 보여주는데 일본사람들은 그러지 않아요. 그렇게 더운 날에도 안에서 뭘 하는지, 내다보지도 않아요.
  어머니가 떡을 하면 한국에서 하듯이 이웃집에 나눠주라고 해서 들고 가면 그 사람들은 어쩔 줄몰라해요. 같은 일본인끼리도 남에게 수치스러운 것은 안 보이려 하니더. 우월감이 지나쳐서 열등감이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끝까지 고통스러운데……』(권)

  전씨가 이제 돌아가자고 재촉한다. 권씨에게서 피로한 기색을 읽은 것이다.

  『사람 사이는 남에게 전부 공개해버리면 재미가 없어요.
  그만 얘기합시더. 권 선생님 피곤하신데……』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요새 아이들은 말을 잘 안 듣잖아요. 그저 칭찬 많이 해주고, 기다려주는 수밖에』(권)

12. 반성하고 또 반성하는 길밖에……

  ―80년대 저항운동에 열심이던 이들이 요즘엔 환경 문제로 많이 돌아선 듯합니다. 두 분은 몸으로 실천하고 계시지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십니까.

  『요샌 운동 갖고 안 되지 않아요? 우선 과학이 반성해야 돼요. 우리는 산업화된 지 30년밖에 안됐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어요. 다시 괭이로 흙을 쪼고, 자연친화적으로 살아야지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 만들어 놓고  이렇게 망가질 줄은 몰랐을 겁니더』(권)

  ―새로운 1천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기말의 우리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는지.

  『요즘엔 뒤돌아보는 사람들이 적어요. 자꾸 앞만 보고 살아가요. 경쟁사회니까. 옛날에 농사짓고 살 때는 경쟁이란 게 없었잖습니까? 한 가지 봉건 시대 때 소작농과 지주, 이런 구분은 있었죠. 그것만 해결하면 됐는데, 지금은 너무 복잡한 사회가 됐어요. 미래를 준비하자면 과거를 제대로 돌이켜보아야 하니더』(권)

『우리 것, 국학의 토대  위에 서야 역사도 신학도, 평등한 사회도 가능한 거 아닌가요. 내 것을 버리고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답답하니더』(전)

  종종 찾아봬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권씨는 『한번쯤 오면 좋은 것만 보이는데, 자꾸 오면 나쁜 것도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면 서로 좋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전화도 1년에 한 번만 하라고 했다.

  안동을 떠난 뒤 권씨의 당부를 어기고 곧 전화를 걸어 전씨가 어떤 분인지 물었다.

『남에게 내세우길 싫어하는 분이시더. 어려운 시대에 사셨던 분들은 다 그런 공통점이 있을 거라요.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지만 열심히 살아가십니다. 제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분이시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만난 지 21년, 전씨는 또 권씨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권선생님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이 있니더. 첫째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는 사람이시더. 산처럼 바위처럼. 둘째 결코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아주 가난하게 살아요. 덜 먹고 덜 쓰고 덜 입어야 죄 짓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셋째 무서울 게 없는 세상이라고들 하는데 그 분은 무서워할 줄 아는 분이시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조차 벽에 붙이지 못해요.  어머니 앞에서 쌀밥을 먹는 게 죄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 글은 《신동아》1997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는 정현상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입니다)


  권정생 선생하면, [몽실 언니]를 지은 작가로, 또 교과서에도 나오는 동화 [강아지똥]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십년 전에는 그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이를 내게 처음 소개해주신 분은 작고하신 이오덕 선생이다. 이오덕 선생은 주지하다시피 평생 동안 어린이문학의 정립과 글쓰기에 혼신을 다하신 분이다.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팔십년 대 초 내가 웅진출판사 편집장을 지낼 때였으니 이십년이 훌쩍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그때 나는 [어린이 마을]이라는 종합교육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 들어갈 동화를 좀 추천해 달랬더니 서슴없이 바로 권선생의 그 [강아지똥]을 추천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씀이, 그이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며 지내는데, 거처가 되는 작은 방에는 생쥐가 와서 함께 밥을 얻어먹고 가는가 하면 여름에는 함께 자도 유독 그이에게만은 모기가 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약간 반신반의 하였지만 이오덕 선생이 누군가. 그런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실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면 그런 고지식한 어른이 아니던가.
아무튼 나는 약간 긴 [강아지똥]을 저학년 아이들이 읽기 쉽게 다소 줄이고 다듬은 다음, 그것을 작가 본인에게 허락받기 위해, 겸하여 인사도 드릴 양 하여, 권선생 더러 서울 나들이라도 한번 하셨으면 했는데, 이오덕 선생의 말씀인즉슨 본인의 몸이 불편하셔서 수십년째 일체 먼길 외출을 삼가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줄인 원고를 들고 그이가 계신 안동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추수도 끝난지 한참 지난 어느 늦가을이었다.
나는 예의를 차린답시고 평소에 하지 않던 양복에 넥타이까지 한 정장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이오덕 선생이 막연하게 가르쳐주신 주소를 따라 권선생을 찾아 떠났다. 이오덕 선생이 가르쳐주신 주소로 말할 것 같으면, 안동에 가서 김서방을 찾아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말하자면 안동군 일직면에 가서 거기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는 동화작가 권아무개를 찾아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런 것을 꼬치꼬치 묻고 점검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가보면 만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냥 나섰던 것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뚫려 지방 어디를 가든 횅하니,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터지만 그때만 해도 안동을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방 도로를 따라 왼종일을 달려야 했다.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국도에는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안동에 도착하여 다시 일직면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한참을 달려서 어딘가에서 내렸다.
그리고나니 약간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디 가서 물어볼 마땅한 데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다짜고짜 아무 구멍가게나 들어가서 이 부근에 동화 쓰시는 권아무개 선생이라는 분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가게 안에 앉아있던 촌로들 몇이 고개를 외로 틀고 서로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며 사신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이들의 눈빛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가만있자.... 저어기 사는 그 영감인지 몰라.”
그리고는 안노인 한분이 일어나 문 밖으로 나오며 길 끝 어딘가를 가르키셨다. 감나무가 심어진 길 따라 가면 마늘밭이 나오고 그밭 옆으로 조금 더 가면 교회 십자가가 보일 것인즉 거기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안노인의 가르침 대로 한참동안 걸어갔다. 과연 저 만치에 양철지붕 끝에 얌전히 고개를 내어 밀고 있는 십자가 하나가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가꾸어진 교회라기 보다는 그저 허름한 농가처럼 생긴 작은 건물과 옛날식 종루가 서있는 비좁은 마당이 나타났다. 나는 마치 초짜 도둑질이라도 나선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작은 마당에 붙은 방의 툇마루에 늙수레한 남자어른이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허름한 옷에 고무신을 신은 그이는 비쩍 말랐지만 한 눈에도 매우 기품 있고 평화로운 인상을 한 사람이었다. 나는 첫눈에 그가 바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내가 찾아왔던 바로 그 권정생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그이는 내가 서울 출판사에서 원고 허락 차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이의 방은 사방에 온통 책꽂이 없이 아슬아슬하게 쌓아둔 책 때문에 그나마 비좁은 방이 겨우 두 사람이 앉아있는데도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였다. 윗목에는 일인용 밥통 하나와 그릇 몇 개, 고무줄로 밧데리를 뒤에서 묶어놓은 낡은 라디오 하나가 있었는데 얼른 보아도 살림은 그게 전부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더니 과연 이오덕 선생의 말씀대로 그이가 식사할 무렵이면 생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가곤 한다는 것이다. 어둑한 방에는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독특한 내음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나는 나의 양복 차림이 어쩐지 이 방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에서 가져온 원고를 꺼내 선생에게 보여드렸다. 그이는 돋보기를 쓰고 가만히 원고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속으로 출장(?) 온 보람을 느끼며 호주머니에서 원고료가 든 봉투를 꺼내어 그이에게 드렸다.

그때로서는 꽤 큰 원고료라 은근히 뽐 내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봉투를 열어본 그이가 대뜸 하시는 말이, 원고료가 왜 이렇게 많으냐는 것이었다.
“예?”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이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원고료가 적다고 불만을 표하는 필자는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원고료가 많다고 뭐라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권선생은 이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추 한포기 값이 얼만데.....”
그러니까, 배추 한포기에 드는 농사꾼의 품에 비해 자신의 원고료는 터무니없이 높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는 봉투를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 위에 던져 놓으셨다. 나는 본의 아니게 죄 지은 꼴이 되어 앉아 있었다. 더구나 양복쟁이의 반지르한 나의 외모가 더욱 나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슴 안 쪽 어디메선가 어쩐지 통쾌한 웃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느끼한 양식 종류를 먹고 나서 깍두기 김치 한 조각을 와드득 씹어 먹는 느낌이었다.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런 방에서 얼마의 세월을 흘러 보냈던가. 영점 칠평의 어두운 감옥. 아무 장식도, 물건도 없이 단지 책 몇 권만 놓인 그 가난한 방.... 나는 그이의 그 방에서 오래간만에 그런 평화를 느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나중의 일이지만, 어느 방송국에서 ‘느낌표’라는 것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속에 책 추천하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에 한번 선정되면 수십만부의 책이 순식간에 나가는 것이 관례였다. 말하자면 출판사나 저자나 갑자기 돈방석에 앉는 것이었다. 물론 그 중에 삼분의 이 이상을 벽지 도서관 건립에 희사하게 되어 있지만 그러고 나서도 남는 것이 보통 억대는 넘었다. 그런데 여기서 권선생의 아무개책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방송사 피디는 자랑스럽게, 그리고 약간은 거만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알리려고 그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런데 권선생 일언지하 왈,
“하지 마세요.”였다.

당황한 것은 피디였다. 설명을 하고 사정을 하였지만 대답은 끝내 노였다. 자신의 책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이것은 출판계에 적지 않는 화제가 되었던 너무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아마 그 피디 역시 내가 이십여년 전 그날 맞았던 그 당혹감을 맛보았을지 모른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말없이 앉아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되어 이제 나오려고 하자 그이가 먼저 일어나시더니 선반에서 부시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었다.
“먼 길 오셨는데 대접해 드릴 것도 없고.... 가면서 입맛이나 다시세요.”
무언가 하고 보니 대꼬챙이에 곱게 꿴 곶감 꾸러미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곶감인지라 언감생심 얼른 받아서 가방에다 넣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이는 고무신을 끌고 버스가 오는 한길까지 뒤따라 마중을 나와 주셨다. 벌써 오후도 기울어 날이 저물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기다려 한길 가에 무심히 서있었는데, 마침 저녁 노을이 길가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붉게 무너지고 있었다. 권선생의 흰 머리 위에도 노을이 물들었다. 차갑지만 선선한 바람이 한길을 따라 불어왔다. 그이의 흰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그 순간, 그이야말로 이 시대에 드물게 남아있는 은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이가 준 곶감 맛은 입떼까지도 곶감을 먹을 때면 아련한 추억처럼 떠오른다.

나는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이랑,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쓰셨던 전우익 선생과 권정생 선생, 이 세분을 일컬어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 부르고 싶다. 각기 다른 삶을 사셨고, 성격도 다르지만 그분들이야말로 평생 변함없이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살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들을 보면 마치 이 산하의 도처에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고목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고집불통인 이오덕 선생은 자신의 충주 돌집 한쪽에 권정생 선생을 위해 손수 흙집을 지어놓으셨다. 불편한 몸을 감안하셔서 정말 아늑하고 편하게 지어 놓으셨던 것이다. 두 분의 우정으로 말하자면 관포지교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권선생은 지금도 여전히 그 비좁은 교회 종지기 방에서 살고 계신다.

이십여 년 전에 콩팥과 방광 결핵 수술을 받고 단지 석 달만 살면 잘 살거라는 의사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몽실 언니]에 나오는 것처럼 불행했던 이 나라의 역사를 사랑하며 살아오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그이의 가난과 낮은 마음이 지금까지 그이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지만 아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자산이다. 다음은 권 선생께서 이십여 년 전 동화집 [강아지똥]의 서문에 쓰셨던 글이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 너무도 불쌍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소설가 김영현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단편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남 가는 길], 장편 [풋사랑], 그리고 시집으로 [겨울 바다], [남해 엽서], 장편동화 [똘개의 모험]등을 간행했다. 1990년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출판사 <실천문학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김영현 2005-03-05 ⓒ 2005 i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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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박골 이오덕 선생님

김영현    

얼마 전에 충주에 다녀왔다. 이오덕 선생의 아드님 되시는 이정우씨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고인의 유고시집을 내가 다니고 있는 ‘실천문학’에서 좀 내어줄 수 없냐는 것이었다. 불감청이언정고소원 (不敢請而固所願)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이오덕 선생의 유고시집이라니 귀가 번쩍 띄었다.
당장에 그러자고 하고 며칠 후, 아내를 운전수 삼아 충주로 내려갔던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이오덕 선생이 생전에 사셨던 집에 한번 가봤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던 차였다. 서울 나들이 때는 자주 뵈었지만 그곳 산 구석 어느 두메에 돌집을 지어놓고 사신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정작 댁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무슨 일로 바빠 문상을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문상은 간 사람이나 안 간 사람이나 사정이 비슷했다. 말하자면 그이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으로 일체의 문상객을 받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고, 아버지의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아드님 정우 씨께서 과연 일체의 문상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문상객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아래 쪽 논에 텐트를 치고 지내다 왔다는 것이었다.  

충주 들입에서 전화를 치고, 다시 무극인가에서 헤매다가 어찌어찌 오후 늦게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우씨의 부인은 그 집으로 가는 길 도로변에서 보리밭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벽에는 이런 시골 식당에 어울리지 않게 신영복 선생의 글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있었다. 이오덕 선생의 돌집은 거기에서 약 십분 더 차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나중에 도종환 시인에게 들으니 정우 씨가 서울에서 장사라고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망할 즈음, 이오덕 선생이 자신의 퇴직금을 주시면서 전국에서 가장 싸고 쓸모없는 곳을 골라서 사라,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자고 해서 마련한 것이 바로 그곳 골짜기였다는데, 곧은박골이라는 골짜기 이름은 아무래도 그이 자신이 붙여놓은 듯한 냄새가 났다.
쓸모없는 땅도 현인이 살다 가면 기가 순한 땅이 되는 이치처럼 그곳 역시 비록 산비탈 발치였지만 도처에 이오덕 선생과 정우 씨의 알뜰한 손길이 묻어 있어 오래전부터 누가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자리였다. 집 입구에는 이선생의 조촐한 시비가, 안쪽에는 권정생 선생의 문학비가 하나 서있고, 넓은 마당 뒷켠에는 염소와 닭을 키우는 우리가 있었다.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기슭에 작은 흙집 하나가 독립적인 가옥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하던 정우 씨가 말하길, 이오덕선생이 권정생 선생이 와서 사시라고 직접 지으셨다는 것이었다. 일곱 평이 채 될까 말까 한 공간에 흙으로 지은 화장실과 부엌이옹기종기 알뜰하게 들어 있었다.
그리고나서 비로소 정우 씨가 우리를 선생의 빈소가 있는 작은 방으로 인도를 했다. 비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반 이층 형태의 방이었다. 창문으로 보니 잎 새가 다 진 겨울 감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이 방이 이 집에서 가장 따듯한 방임을 방에 들어가자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런 가구도 장식도 없이 그저 영정과 선생의 안경, 만년필이 놓인 책상 하나와 오래된 묵화가 담긴 액자 두어 개가 전부인 이방은 평소에 이오덕 선생이 쓰시던 방이었는데, 지금까지 정우 씨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후끈후끈하게 불을 넣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겨울을 빼고 나면 그 산등성이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천막 살이 시묘를 한다고 하니, 그의 강직한 성품과 효심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는 그는 손재주도 좋아 혼자 그림을 그리고 흙으로 여러 선생의 조상(彫像)을 빚기도 했다.
영정 앞에 묵념하고 책상 위에 놓인 그이의 굵은 뿔테 돋보기안경과 햇빛 환한 미소를 뵈오니 살아생전 모습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 오오, 덧없어라! 강 같은 세월이여....
내가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팔십 년대 초 웅진출판사에서였다. 나는 채 서른도 되지 않는 젊은 초대 편집장이었는데, 그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몇몇 자문위원을 두었다. 성내운, 신경림, 이철수, 그리고 이오덕 선생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동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내게 이오덕 선생은 자문위원이자 큰 선생이셨던 셈이다.
그이가 내게 처음 소개해주었던 원고가 지금은 고전이 되어 버린 ‘이원수 문학전집’이다. 원고 보따리만 한 리어카는 되는 분량이었는데, 이원수 선생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출판사에는 절대로 원고지를 넘기지 않겠다는 이오덕 선생의 뜻에 따라  (이오덕 선생은 이원수 선생을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대간으로 알고 계셨기에) 지금까지 그대로 들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원고를 들고 사장을 설득하여, 마침내 그 원고는 빛을 보게 되었다.
이오덕 선생은 우리 아동 문학이, 그리고 나아가 아이들이 병들어 있는 이유는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잘못된 교육 풍토와 더불어 이원수 선생이나 권정생 선생 같은 삶의 현실이 녹아 있는 우리의 좋은 작품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대신 동심 천사주의나 소공녀, 소공자 따위 국적불명의 외국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허황되게 넋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이가 아이들의 글을 모아 펴낸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는 진정한 글쓰기의 전범이 무엇인지 보여줘 장차 후배 교사들이 글쓰기 모임을 결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창비에서 펴낸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지금까지 아동문학 평론서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이는 우리 아동문학의 큰 흐름이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큰 지도를 그려준 분이었다.

나는 언제나 철사 줄처럼 강해 보이는 반백의 머리를 넘기며 큰 입으로 웃으시던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참동안 영정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우 씨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느닷없이 시장에 가서 건반을 하나 사오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을 떠올린다
.
“난 그 전까지 아버지께서 건반을 치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건반을 사달라고 하시니 의아할 수밖에요. 사실 아버지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취미가 있긴 하셨지만...”
그리고는 나가라고 하였는데 잠시 뒤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놀랍게도 베토벤의 월광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젊은 교사시절 그이가 통영 부근에서 근무할 때 윤이상 선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는 것이다. 윤선생이 동백림사건으로 걸려들고 끝내 이곳에서 사면이 되지 못하자 스스로 음악을 포기해버렸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과 음악이 흐르는 땅... 이제 나 그곳에 가겠네.> 그이의 마지막 유고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렇게 유고시 뭉치를 챙겨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나는 발문을 나의 오랜 친구인 시인 도종환에게 부탁을 했다. 그 역시 평소 이오덕 선생을 따르던 사람 중의 하나인지라 일언지하 “그러마”고 했다. (도종환 시인 역시 깊은 산 속 황토집에서 산딸기 따먹으며 혼자 생활을 한 지 수년이 지나고 있으니 언젠가는 또 그이의 이야기를 해보리라.) 그리고 보내 준 글이 다음의 글이니, 그러니까 나의 글은 그의 글이 나오기 위한 군더더기요, 길잡이 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길지만 도종환 시인의 발문을 함께 읽어 보자. 시인의 눈에 비친 한 인간의 생애를 더듬어보는 것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동심으로 쓰는 이야기 시

팔십 년대 말인가 교육운동을 한참 활발하게 할 무렵 이오덕 선생님을 모시고 강연회를 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자리에서 이 세상에서 시인이 제일 나쁘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쁜 시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인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씀 하시는 게 마음에 좀 걸렸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른 글쓰기의 관점에서 볼 때 바르게 글을 쓰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이 시인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바르게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을 비틀고 쥐어짜고 어렵고 모호하게 만들어서 바른 생각을 쉽게 표현하여 삶을 가꾸는 데 이바지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 때는 아직 젊어서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편치않았다.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글을 잘못 쓰고 있는 문인들의 글을 하나하나 골라내어 왜 어떻게 잘못 쓰고 있는지 근거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지적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하셨다. 거기 실명으로 뽑혀 올라오는 글을 보고는 선생님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글을 잘못 쓰고 있는 사례뿐만 아니라 말을 잘못해도 바로 그 이야기를 글로 써서 발표하시곤 했다. 권태응문학제에서 오고갔던 “감자꽃” 이야기나 “목계나루”에 시비를 세울 때 이야기 같은 것은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지라 실명으로 거론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들은 가능하면 이오덕 선생님 옆에는 가지 않는 게 좋다고 웃으며 말하곤 하였다. 이번 유고시집에 실려 있는 이 시를 읽으면서도 그 생각이 떠올랐다.

전형은 오늘 밤에도
자리를 친다
자리를 치면서
글 쓰는 사람을 욕한다
“연암이 쓴 글에
글자가 나와서 사람이 모두
병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글을 쓰지 말아야 해
쓰지도 말고 읽지도 말고
책은 다 불살라 없애야 해
내가 권 선생한테
이 목사 제발 글 그만 쓰라 하라고
말했어.
......(중략)......
내가 전형보고
“그런 생각 제발 글로 써서
좀 알려 봐.“ 했더니
“난 자리 치는 게 좋아.
글 쓰는 사람 한 사람도
바르게 사는 사람 없더라.“

--「자리를 치는 전형」중에서

전형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이다. 전우익 선생님도 똑같다. 글 속에 나오는 권정생 선생님까지 세 분이 모두 같은 분들이다. 조그만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야말로 우리에겐 정말로 소중한 분들이다. 소설가 김영현은 이 분들을 일컬어 영남삼현이라고 한다. 옛부터 집안에 판서 셋 나온 것이 대제학 하나 나온 것만 못하고 대제학 셋 나온 것도 선생 하나 나온 것만 못한데 선생 셋도 처사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분들이야말로 옛날로 치면 처사에 해당하는 분들이 아닐까 싶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이시다. 아무런 세속적 지위나 자리가 없는, 아니 그런 지위는 꿈도 꾸어 본 적이 없는 참된 분들이시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글 쓰는 사람들을 미워하실까. 글이 주는 해악이 이로움보다 많아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이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고 의롭고 청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고 혼탁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세태가 안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지(1527-1602)는 그의 명저 『분서』에서 일찍이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공부하는 자들이 많은 독서로 의리를 깨우치다 자신의 동심을 가리게 되었다면, 성인들은 또 어째서 많은 책을 지으시고 말씀을 남기셔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동심을 가리게 하였을까? 동심이 가려지고 나서 말을 하면 그 말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게 되고, 천거를 받아 정치를 하게 되면 정사에 기초가 없어지며, 저술한답시고 문장을 지으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문장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내용이 칠칠하지 못하고 내포된 바가 독실해 빛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니, 한 구절 덕스러운 말이나마 구하려 해도 끝내 얻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동심이 가리어진 마당이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견문과 도리가 마음자리를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언사가 비록 아름다워도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은 어찌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일을 꾸미고 거짓 문장을 지어낸 때문이 아니겠는가?...이렇게 해서 거짓말을 거짓된 사람에게 말해주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며, 거짓된 문장을 거짓된 사람과 토론하니 거짓된 사람이 기뻐하게 된다.

유명한 <동심설>에 나오는 말이다. 동심이라는 게 마음의 처음 모습인데 그런 진실한 마음을 잃게 되는 과정이 독서와 의리지학 때문이라고 이서는 지적한다. 의리지학이란 경전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 명칭과 이치를 따지는 학문인데 구체적으로는 송대 이후의 정주이학을 가리킨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학문과 그것을 토대로 한 견해들이 독서를 통해 들어와 사람의 내면을 주재하면서 동심은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박학다식해지는 것으로 여기고 그로 인해 이름을 얻으면 이름을 드날리려고 애쓰게 되고, 그렇게 미명(美名)에 매달리면 서 동심, 즉 진실하고 인간다운 심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성인들은 많은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이 동심을 보호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했는데, 보통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동안 동심을 버리는 일이 대부분이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심을 버리고 쓰는 글은 내용이 진실하지 못하고 그 삶이 거짓되며, 거짓된 것을 만들어 내고 기뻐하며 거짓된 사람과 토론하고 거짓된 일의 결과를 널리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이 글 쓰는 일이라면 글 쓰는 일의 해악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이나 전우익 선생님의 이야기도 이지의 이런 동심설과 맥락이 통하는 데가 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글 쓰지 못한다면 글 쓰는 것보다 돗자리 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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