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길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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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조상현
SUBJECT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삶만큼 극적이고 역동적인 것은 없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TR)의 삶만큼 극적이고 역동적인 것은 없다

제26대 미국 대통령(1901∼09년 재임)인 그의 기념비에 적힌 글귀다.
그는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루스벨트하면 ‘뉴딜’ 정책과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랭클린 D. 루스벨트(FDR)를 연상한다. TR는 FDR 의 먼 삼촌이다. 그러나 TR는 어느 대통령보다 미국인에게 친근감 있게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그에 대한 기억은 불쾌하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 평화조약(1905년 9월)을 중재했다(‘월간중앙’ 8월호, 포스머스 현장르포 참조).

그 역할로 TR는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탔다. 반면 그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 외교권을 넘기고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조선을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없는 나라”라며 무시했다. 그 부분에 대한 개탄과 미움도 그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자극을 주었다.

‘큰 바위 얼굴’에 새겨진 위대한 인물

러시모어(Rushmore) 마운틴의 큰 바위 얼굴. 미국 중서부 대평원의 사우스 다코다 주에 있는 러시모어 산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흉상(胸像)이다. 코 크기만 6m, 얼굴 길이가 20m다.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4명(워싱턴·제퍼슨·TR·링컨)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TR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를 알 수 있는 현장이다.

1927년 조각가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이 돌을 깨기 시작해 완공까지 14년이 걸렸다. 누구를 새길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다. 워싱턴(건국)·제퍼슨(독립선언서 기초)·링컨(연방 유지와 노예 해방)은 논란이 없었다.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TR와 우드로 윌슨이 경합했다. 윌슨은 1차대전을 통해 미국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높였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리더십을 새롭게 정립하고 미국사의 지평을 넓힌 TR로 낙착을 보았다.
그는 하버드 대학 최우수 졸업생이었고 카우보이였다. 독서광이었고 잡지 편집인, 칼럼니스트였다. 무려 38권의 책을 냈다. 울음 소리만 들어도 어떤 새 인지를 알 정도의 조류학자였다. 해군 전략가였고 전쟁영웅이었다. 최연소 대통령(43세, 케네디 이전까지)의 기록도 세웠고 보안관의 삶도 있었다.

극과 극을 오갔다. 곰 인형 ‘테디(Teddy, 그의 애칭)베어’는 그의 동물 사랑 일화에서 탄생했지만, 그는 사자·코끼리를 잡은 프로 사냥꾼이기도 했다. 그때는 통했지만 지금의 기준에서는 표리부동이다. 전쟁불사론자이면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미스터 제국주의’였지만 분쟁의 조정자였다. 그는 이상과 실용의 조화, 지성과 야성의 융합을 추구했다.

TR는 1858년 10월27일 뉴욕시 맨해튼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뉴욕 주 출신 대통령은 4명으로, 그 중 뉴욕 주의 뉴욕 시 출신은 TR 혼자다). 그는 어렸을 때 심한 천식(喘息)을 앓았다. 아버지는 “건강한 육체 없는 정신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격투기를 배웠다. 권투는 선수 수준이 되었다. 그는 육체적 방어 능력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는 국가도 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의 밑바닥을 형성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던 해(1880년) 결혼했다. 2년 뒤 뉴욕 주의회 의원에 당선했다. 전도 유망한 정치가였다. 26세 때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쳤다. 어머니와 아내가 같은 날 숨졌다. 그날은 발렌타인데이였다. 어머니는 장티푸스로, 아내는 첫 아이를 낳다 신장병으로 숨졌다. 그의 일기장에는 ‘빛이 사라진 삶’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는 동정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부의 황야로 달려갔다.노스다코타 주의 배드랜즈에 목장을 차리고 카우보이가 됐다. 보안관 대리를 맡고 황야의 무법자들을 집요하게 쫓기도 했다. 스미소니언 대통령 전시실에는 그 시절에 입었던 카우보이용 바지(chaps)가 있다. 이런 설명문이 붙었다.

‘첫 부인이 죽은 후 광대한 침묵의 공간을 찾아갔다. 그곳은 그의 불굴의 삶을 복구시켰다.’

서부 생활 2년쯤 되던 해 혹한이 몰아닥쳐 목축업을 접었다. 뉴욕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집, 사가모어 힐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첫 시도(뉴욕 시장선거 출마)는 실패했다. 그는 1889∼95년 연방정부 공공서비스위원회 위원으로 일한다. 그리고 그 뒤 2년간 뉴욕시 경찰국장을 지냈다.

그 시절에 TR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뉴욕 경찰은 마약·매춘·도박업자와 은밀히 거래하고 있었다. 그는 악명 높은 부패의 퇴치를 선언했다. 심야에 맨해튼을 기습 순찰했다. 망토와 모자로 변장하고 근무태만한 경찰을 적발해 혼을 냈다. 부패에 질려 있던 시민들은 박수를 쳤다. 뉴욕 경찰의 변화 모습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군부 차관보로 발탁됐다.

차관보 자리 박차고 중령 계급 달고 쿠바戰 참전

뉴욕시 동쪽 롱 아일랜드의 북쪽 해변에 있는 휴양지 오이스터 베이. 사가모어 힐로 불리는 TR의 저택과 농장이 남아 있다. 국립 역사 유적지다. 지은 지 120년 된 빅토리아 풍의 3층 저택은 23개의 방이 오밀조밀 배치돼 있다.

TR는 두번째 부인, 6명의 자녀들과 이곳에서 살았다. 재임중에는 워싱턴의 더위를 피해 ‘여름 백악관’으로 썼다. 지난달 중순 그곳을 방문했다. 여름 휴가가 끝?한적한 평일 오후인데도 200여 명의 관광객이 있었다. TR의 활기찬 삶을 반영하듯 다양한 유물로 차 있었다.

1층 한구석에 있는 30cm 높이의 청동 조각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날뛰는 야생마 ‘브롱코’를 탄 독특한 군복차림의 TR의 모습이다. 나는 함께 관람하던 TR기념회 연구원(패트릭 해리슨)에게 조각상에 대해 물었다. 그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의 TR 형상”이라고 말했다. 그 곳에 적혀 있는 사연은 이렇다.

해군 차관보 시절 그는 서반구에서 스페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때 스페인의 강압적인 쿠바 통치는 미국사회의 논란거리였다. 1898년 2월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 정박했던 미국 전함 메인 호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해군 260여 명이 숨졌다.

사고 원인은 불확실했지만 미국은 스페인을 의심했다. 여론은 쿠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전쟁을 요구했고 미국은 선전포고를 한다.

TR는 참전하기 위해 차관보를 그만뒀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도 놀랐고 일부에서는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40세 때다. 그는 애국의 깃발을 세우고 ‘러프 라이더’(Rough Rider)라는 별명의 기병대 자원병을 모집했다.

자원병에는 하버드 대학 시절 미식축구 쿼터백도 있었고, 뉴욕 경찰관도 있었다. 러프 라이더는 거친 말을 잘 다루는 카우보이라는 뜻이다. 그는 중령 계급을 받았다. 쿠바의 샌 후안 힐 고지 전투에서 명성을 높였다. 100여 명의 사상자도 났다.

그 해 8월 미국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다. 러프 라이더의 전술적 역할은 미약했지만 국민들은 열광했다. 애국심의 화신, 전쟁 영웅의 출현이었다. 해리슨은 이렇게 평가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국민을 열광시키고 애국심을 높인다. 해군 차관보에서 장군도 아닌 비정규군 중령으로의 충격적 변신, 죽음을 무릅쓴 돌격에서 국민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수를 맛보았다. TR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그런 승부사적 기질에서 생겨났다.”

TR는 ‘위대한 원정’이라고 자부했다. 대통령 퇴임 뒤에도 러프 라이더 지휘관으로 기억되기를 즐겼다. TR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을 바랐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은 그의 정부 비판이 불만이었다. 훈장은 없었다.

그리고 100여 년 뒤인 2001년 1월. 퇴임 직전이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TR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하고 TR의 증손자에게 주었다.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였다. 클린턴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우리 국민에게 영웅적 비전을 심어 준 영웅적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워싱턴 DC 북쪽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1층에 ‘신 제국 미국’이라는 표식이 붙은 작은 부스가 있다.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미국은 제국주의 열강으로 변모했다는 해설이 달려 있다. TR는 스페인과의 두 개의 전선 중 쿠바에서 직접 참전했다. 또 다른 스페인 식민지인 필리핀에서는막후(해군 차관보)에서 활약했다.

스페인과의 갈등이 고조되는데도 백악관은 확실한 전략이 없었다. 전통적 고립주의는 전쟁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TR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조지 듀이(George Dewey) 아시아 함대사령관에게 극비 훈령을 내렸다.

전쟁이 선포되면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해군 차관보는 지휘 계통에서 낮은 위치다. 그러나 TR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했다. 듀이는 간단히 스페인 함대를 제압했다.

듀이의 초상화 아래 적힌 글은 나의 역사적 감수성을 자극했다. ‘듀이는 TR와 앨프리드 마한(Alferd T. Mahan)의 친구로서’라는 부분이다. 마한은 근대 미 해군 전략의 창시자다. 국가 흥망이 해군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전략적 시각이다. 해군력 강화와 식민지 경영을 내세웠다. TR도 탁월한 해군 전략가였다.

그가 대학 졸업 직후 출판한 ‘1812년 해전’(영미해전)은 대학 교재로 사용될 정도다. 그는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워싱턴의 교훈에 ‘그것을 뒤받침하는 것은 해군력’이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미국사의 운명이었다.

내 옆에서 퇴역 해군 장교인 더렉 피어슨도 그 글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당시 미국은 역사의 기로에 있었다. 고립주의냐, 제국주의냐의 사이에서 망설였다. 루스벨트와 마한·듀이 3인은 매킨리 정부 내에서 예외적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세적 역할로 미국은 제국주의로 달려갔다.”

역사는 국가 엘리트의 비전과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신념, 지혜, 용기를 가진 인물이 만드는 것이다.

매킨리 대통령 암살로 대통령직 승계

대중적 인기를 몰아 뉴욕 주지사선거에서 당선했다. 개혁 정책을 밀고갔다. 그가 속했던 뉴욕의 보수적 공화당 지도자들은 그런 노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TR를 뉴욕에서 퇴출시키기로 했다. 묘안은 부통령 후보로 내세워 워싱턴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재선에 나선 매캔리 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되었다. 매킨리는 재선 취임 첫해인 1901년 9월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된다. 부통령 TR는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의 인생은 또 다른 역동의 궤적을 그린다.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의 커리큘럼은 미국의 군사외교전략, 전쟁과 평화에 맞춰져 있다. 고급 장교 양성 과정인 그 대학은 TR의 대통령 재임중 세워졌다.

꼭대기에 거대한 독수리가 조각된 붉은 벽돌의 학교 건물은 장엄한 느낌을 준다. TR홀이라는 건물 별칭대로 1층에는 4개의 TR자료 진열장, 초상화, 흉상이 있다. 흉상에는 ‘부드럽게 말하되 큰 방망이를 갖고 다녀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아프리카 격언인 이 말은 TR의 외교 레토릭이다. 큰 방망이는 팽창주의, 힘의 외교다.

그는 ‘먼로(5대 대통령)의 고립주의’에 이른바 ‘루스벨트 추론’을 첨가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불안정한 곳에 미국이 국제경찰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말투(친선)와 큰 방망이의 전략적 조화를 추구했다.

대통령이 된 뒤 그의 야망은 파나마 운하에 맞춰진다. 그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운하 건설을 국익의 필수 요소로 판단했다. 파나마는 콜롬비아 영토였다. 미국은 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떼어놓기 위해 독립 세력을 지원했다.

미국 군함을 파견해 무력으로 콜롬비아를 위협했다. 파나마는 독립했고 운하 건설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TR는 파나마 운하를 자신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았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외교의 도덕성에 큰 상처로 남았다.

21세기를 연 부시는 20세기를 개막한 TR와 닮았다. TR는 미국식 제국주의 시대를 개막했다. 지금의 미국은 극(極)초강대국(Hyperpower)이다. 애국주의는 미국사회의 한복판을 흐르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TR처럼 힘의 외교를 기본으로 한다. 미국의 가치와 생존이 위협받으면 전쟁도 불사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섬에 전쟁과 평화에 대한 TR의 명쾌한 어록이 있다.

“정의(righteousness)와 평화(peace) 중 한 개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정의를 선택할 것이다.”

TR는 “치욕스러운 평화를 거부하고 우리의 선과 정의를 수호하자”고 말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 같은 자세는 남북전쟁 때 링컨의 철학이었다.



조선 亡國 재촉한 포츠머스 조약 주도

러일전쟁에서 전세가 일본쪽으로 기울자 조선은 초조했다. 고종과 중신 민영환·한규설은 미국의 도움을 얻으려고 했다. 그들은 조·미(朝美)수호조약(1882년)에 의존했다. ‘어떤 나라가 조약국의 한쪽을 경모(輕侮·업신과 모욕)하는 일이 있으면 필수 상조(必須相助·반드시 서로 돕고)한다’는 규정이다. 포츠머스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가 미국의 지원으로 논의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최후의 살 길인 듯했다. 그 비장한 드라마가 사가모어 힐에서 펼쳐졌다.

이승만이 밀사로 뽑혔다. 일본의 감시 때문에 공식 외교 창구는 소용 없었다. 이승만은 1904년말 미국으로 들어간다. 1905년 6월말 하와이 교민들은 관련 청원서를 TR에게 내기로 했다. 이승만은 TR와의 면담을 추진했다.

그 무렵 육군부 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일본 방문에 앞서 하와이를 찾았다. 하와이 교민회는 환영 집회를 열었다. 루스벨트 앞으로 소개장을 부탁했고 태프트는 써 주었다.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대표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사가모어 힐로 떠났다. 그리고 7월6일 TR를 만났다. ‘이승만 전기’(신화에 가린 인물, 로버트 올리버 지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가슴은 떨렸다. 접견실로 안내된 직후 또 다른 마차가 도착했다. 포츠머스 회담의 러시아 대표인 위테 일행이었다. 루스벨트는 기병대 복장이었다. 루스벨트는 잠시 후 두 사람이 기다리던 방으로 들어왔다. 귀하와 귀국을 위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두 사람은 청원서를 제출했다.’

TR는 공식 외교 경로로 청원서가 들어오면 포츠머스 회담 의제로 제출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면담이 성공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장벽에 부닥쳤다. 워싱턴의 조선 공사(김윤정)는 청원서 제출을 거부했다. 공식 문건이 아니라 사적(교민단체) 문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윤정은 일본과 손잡고 있었다.

TR의 호의도 철저히 2중적이었다. 그는 태프트에게 일본 총리 가쓰라(桂)와 밀약을 맺으라는 지시를 해 놓고 있었다(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 식민지인 필리핀을 일본이 침략하지 않는다는 내용). 외교의 도덕성보다 이해관계를 중시했다. 포츠머스 회담을 앞두고 조선의 밀사를 만난 것은 중재외교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제스처였을 것이다.

또 다른 비화도 있다. 일본을 방문하는 태프트 일행에 TR의 큰딸(앨리스, Alice)이 있었다. 앨리스는 TR의 비공식 외교 사절이었다. 앨리스는 나중에 태프트와 떨어져 중국을 거쳐 9월 중순 한국을 방문했다. 포츠머스 회담 타결 직후였다. 앨리스는 군함 오하이오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뒤 특별 기차편으로 서울로 갔다. 그 내용은 ‘TR의 가족사’(스테이시 코더리, Stacy R. Cordery 지음)에 간단히 적혀 있다.

‘한국인은 슬프고 풀이 죽어 있었다. 일본의 통제에 들어가고 있었다. 어찌 할 줄을 몰랐다. …고종과 황태자(순종)와 오찬을 했다. 부산한 환대를 받았다. 열흘간 머무르는 동안 공식 환대가 지겨울 정도였다.’

TR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조선 조정과 친분을 유지하려고 했다. 고종의 오찬 주재는 어떻게든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는 안간힘의 표시였다.

대기업 독점 깨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 펼쳐

그는 퇴임 후 1년간 아프리카 밀림을 돌며 300마리의 동물을 잡았다. 복도에는 테디 베어의 삽화를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테디 베어와 헌터 테디(사냥꾼 루스벨트)는 정반대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렇게 공존했다.

TR는 미시시피 주에 갔을 때 곰 사냥을 했지만 빈손이었다. 부하들이 곰을 잡아 TR에게 총을 쏘라고 권유했다. 루스벨트는 거절했고 곰을 놓아 주었다. 그 일화를 만평가 클리포드 베리만이 ‘워싱턴포스트’에 소개했다. 지금도 테디 베어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인형이다.

그는 자연보호 운동을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무분별한 개발을 막기 위해 강력한 법적 보호망을 만들었다. 그의 재임중에 국립공원은 2배로 늘어났고 16개의 국립 명소, 51개의 야생 서식처가 생겨났다. 2,500개의 댐 건설이 취소됐다. 그의 정책은 보수주의자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지금의 미국인은 그 덕분에 자연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스미소니언 대통령 코너에는 ‘경제의 관리자’라는 주제의 전시물이 있다. TR가 대기업의 독점을 깨기 위해 대포를 쏘는 신문 만평이 놓여 있다. 국내정치에서 혁신의 시대(Progressivism)를 열었다는 대목도 있다.

그는 공화당의 보수적 노선에서 벗어나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의 이념적 코드는 ‘공평한 대우’(Square Deal)다. 모든 사람들은 부와 권력에 상관 없이 성공의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방정부의 역할을 특정 집단의 대변자가 아닌 공익의 조정자로 설정했다.

그는 경제 집중, 독점을 막는 데 힘을 쏟았다. 트러스트(기업연합) 체제를 깨기 위해 철도를 장악하고 있던 북부 증권회사를 압박했다. 노동정책에서도 획기적 변화를 끌어냈다.

광산노조 파업 때 사용자측이 연방정부의 중재를 거부하자 TR는 군대를 파견해 광산을 접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사용자측은 굴복했다. 사용자편이었던 과거 연방정부와는 달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노동자의 편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트러스트를 파헤쳤지만 시장경쟁의 기본 흐름은 막지 않았다.

TR는 대중의 우상이었다. 재임중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수십 년간 백악관은 기업가의 압력에 눌려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TR는 그런 이미지를 씻고 대통령의 권한과 역할 공간을 넓혔다. 1904년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 업적 성적표에서 대체로 5∼10위를 차지했다. 1948년 아서 슐레징거 교수가 대통령 평가 설문을 실시한 이래 링컨·워싱턴·FDR가거의 1∼3등을 차지했다. 그 뒤를 제퍼슨·윌슨·TR·투르먼 등이 따랐다. 2000년 찰스 파버와 리처드 파버가 공동 실시한 조사에서 TR는 7위였다.
신문기자 출신인 밀러(Nathan Miller)의 평가서에서는 5위를 차지했다. 학계·언론계·여론조사의 대체적인 평가 잣대는 ▷국가 비전▷정책 목표▷업적▷대중 지도력▷위기 관리 능력▷업무 수행 능력▷용기·결단력▷도덕성·성격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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